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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N유학 이보현 원장의 호주체험기 - 어학연수부터 ICMS 매니저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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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생활을 뒤돌아보며 (영어학교부터 ICMS호텔학교, 대학원 그리고 ICMS 매니저가 되어..)

안녕하세요. 호주 iBN유학 시드니 이보현 (Scott) 입니다

매일 정신 없고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저로썬 뒤돌아볼 시간이 많이 없었답니다
가정과 일 그리고 지금도 제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많이 상담하다 보니 학생들에게 "성공하셨네요" " 부러워요" 이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사실은 조금 부끄럽기도합니다
그리고 생각 합니다 과연 성공이 무엇일까? 여러분의 성공 기준은 무엇입니까?
성공에 대한 기준은 있나요? 전 호주에서 고생만 했는데 그런 제가 성공한 것이 맞습니까?

지금부터 한국과 호주에서의 모든 저의 생활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글을 읽으신 후에 정말 성공이라면 여러분도 하실 수 있습니다.

저의 생활은 그리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가 호주 와서 지금까지 한 모든 일들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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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본명은 이보현
영어학교, 호텔학교(ICMS), 대학 (Macquarie University) 그리고 대학원 (Master of Information System)
지금은 호주 시드니에 거주 하고 있습니다

호주 Sydney Hilton Hotel 2년, Manly Pacific Parkroyal Hotel 3년 그리고 iBN유학 Director 와 ICMS 매니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시작 합니다~ ^^



한국에서의 학창시절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돈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했다 그때만해도 나의 꿈, 아니 내가 항상하는 말은 언제쯤이나 돈 걱정하지 않고 생활 하나였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전학을 무려 여덟 번이나 했다 우산, 덕의, 고척 계남, 전농, 도신 초등학교 그때 만해도 내가 왜 전학 을 그리 해야 하는지 어머니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초등 학교 때는 한번도 참고서를 사보지 못했다 동아, 표준 뭐 이런 출판사 에서 참고서가 많이 나왔었는데…… 그리고 내가 제일 싫었던 것은 학교에서 부모님 드리라고 주는 가정통신문 그리고 육성회비 그 당시 5천원 정도였던 것같다.

난 이런 것들을 한번도 제대로 내 본적이 없었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도 싫었다.
사실 머리는 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이윤 도신 초등학교 6학년 다닐 때 남부교육구청 에서 하는 어린이 과학동산도 학교 대표로 나갔었으니깐……

근데 난 구구단을 왜 4학년때 뛰었을까!!. 지금도 기억 난다 고모집에 있을 때 엄마에게 울면서 산수 땜에 미치겠다고 한말 전학을 많이 다녀서 학교수업을 따라 가지 못했고 4학년 이후부터는 전학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느꼈던 거 같다. 이렇게 힘든 초등학교시절을 마치고 난 중학교로 갔다. 서울 당산 중학교에 다니면서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학교로부터 영등포 경찰서에서 주는 상과 장학금도 그리고 학교에서는 표창장도 받았으니깐 ㅋㅋㅋㅋ 대견한 놈이였던거 같다.

그때 많은 도움을 주신 당산중학교 3학년1반 이철구 선생님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으셨고 지금의 나를 만드신 분이기도 하다. 한국에 가면 꼭 선생님을 찾아 뵐 계획이다.

그 당시 어머니께서는 구로공단에서 근무 하셨다. 8공단 (주) 일신통신. 어머니의 한달 월급은 (1990년) 28만원 난 중학교 때도 역시 참고서는 여유로이 살 형편이아니었다…..

그 당시 이명재. 나의 친구 지금은 한양대 대학원을 졸업 했을 건데…그 친구는 나에게 항상 참고서를 빌려 주었다. 한달에 한번 어머니의 월급날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먹을수 있었다 그건 바로 페리카나 양념통닭^^.

지금도 한국에 있는지??? 난 탕수육보다 자장면을 좋아했고 고기는 삼겹살을 좋아했다. 사실 지금도 입맞은 싸구려다. 하지만 난 메이커 입는 옷도 싫어했다 이윤, 입고 다니는데 부담 되어서. 사실은 비싸게 어머니가 사주신 옷 입고 담 넘어서 도서실 가다가 찢어진 이후론 절대 안입는다. 자장면 20그릇을 한번에 찢어 먹었으니깐……. 그런 이후 난 대영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사실 고등학교땐 공부만 했다.

한림 독서실에서 공부 할 때 원장님이 공짜로 한달 하라고 까지 했다 이윤???
공부 열심히 한다고.. 사실은 집에 가도 할께 없어서 도서실에 있었던건데……
그런 나에게 호주에 있는 사촌 형을 만날 수 있었다. 형은 UNSW 대학을 졸업한 의사…
그때만해도 " 사 " 로 끝나는직업이 짱 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그런 " 사 " 로 끝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난 호주로 가고 싶었고 형이 오라는 말에 귀가 쏠렸다…. 바로 그때부터 나의 방황기가 시작된 것이다. 해법 수학을 풀 때 어려움이 있으면 난 생각했다.

"이런문제는 호주에는 안나오겠지 하고 통과!" 이런식으로 하다 보니 나의 성적은 왕창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대학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당시 내 친구는 성적으론 나와 비교도 안됐는데, 아주대학교에 미달로 붙었고 난 우리 엄마에게 그 애와 매일 비교 당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골 때린 것은 주변에서 보는 시각 이였다. 고등학교 성적이 5등이던, 55등이던 다 같은 재수생 취급한다는 점이다. 난 재수 할 돈도 없었고 그런 공부를 다시 할 자신이 없었다….

막판에 좀 놀긴 했지만 그래도 그 동안 얼마나 공부 했는데 그것도 X 같은 환경에서 굴하지 않았건만……..
이제부터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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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유학 결심과 진로


그때만해도 유학은 부자들만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 반대의 경우다 한국에서 하는 돈이나 호주에서 하는 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했다.
단지 생활비가 많이 든다는 점. 난 돈이 없었고 호주에서 일하며 공부 한다면 할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물론 큰집에도 기대를 한건 사실이다. 사촌형이 의사니깐 조금은 도와 주겠지 하고 생각 했다.
그리고 호주 행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호주로 올 때 막연히 호텔 경영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유학은 거의 호텔 아님 관광 경영에 관심이 떠오를 때 였으니깐…. 그리고 나는 한국에 교육 제도에도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물론 막판에 놀았다 해도 이렇게 재수생에겐 찬밥 이라니!!!!

한번은 선배 형과 동대문 평화 시장에 옷을 사러 가다가 외국인을 만났다.
외대를 다니는 형이 영어 한마디 못하는 것이었다…그래서 물었다.

"난 대학에 떨어 졌지만 형은 그래도 외대 다니는데 뭐했어?"

그러다 길거리에서 형에게 맞아 줄을 뻔 했다 그래도 선배인데 대학생이라는 것을 비꼬아 얘기한 나의 잘못이 컸다…… 그래도 그렇지 전공도 영문과 이면서 ㅋㅋㅋ

한국에선 문법과 단어, 읽기, 듣기는 수업이 있다 그런데 말할 기회는 사실 한번도 없었던 거 같다.

난 호주에서 학위 보다는 앞으로의 꿈을 생각해서 듣기와 말하기 특히 듣기 에 중점을 두었다 내가 호주 올 때 난 이렇게 생각했다….

"나의 영어 실력은 3살 앞으로 4년 정도 공부 한다면 7살 수준은 되겠지"…

그리고 한국에 7살 나이 아이들 얼마나 말을 잘하는가..
물론 정치경제는 모르겠지만 내가 호주정치, 경제는 알바 아니었으니깐. 이런 마음으로 난 공부를 시작했다.

3살 아이로 돌아가서 듣기……
들어야 말하니깐 그 다음 말하기……읽기…쓰기 난 이렇게 시작했다.

3살 아이가 쓸 수는 없으니깐.
물론 돈이 없어서 일을 해야 했고 내가 간 곳은 Gosford 산 골이었다

그곳은 버스가 6시 이후는 없었다.
이런 곳에서 난 일을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세차 였다.
시내와 떨어진 곳이어서 가족 수대로 차가 있었고 난 집주인의 도움으로 그 동네 차를 닦았다 그리고 한대당 $4씩 받았다.

그때는 차 한대 있는 집이 제일 싫었다 사실 거 의 2 대는 있었다.
내가 $4 불로 정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세차는 6~7불 난 4불이었고
그 동네는 거의 두 대 씩은 있었다 두 대면 8불…..
그런데 대부분은 10불 짜리 지폐로 두었고 2불은 Tip 으로….
그것이 나의 호주에서의 첫 상술~ 아니 잔머리 ㅋㅋㅋㅋㅋ.
그런데 이것도 문제는 있었다 차가 없는 나로써는 그 넓은 동내를 걸어 다녀야 했고

집 찾는데도 시간을 많이 소비 했다.

그리고 여름은 더워서 소금이라도 들고 다니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집주인은 모자를 주었고 난 그 허름한 모자가 너무 고마웠다…
그때 호주인의 친절함을 배웠고 여기서 살아 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지금도 난 유학을 결심한 어린 친구들에게 이곳을 소개한다….시내는 어린아이들이 금방 물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도 1년에 받을 성적을 그곳에선 6개월 만에 받는것이다.
제술, 광진, 혜진 그리고 지희 그곳으로 최근에 보냈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

거의 4달 후쯤 난 ICMS (International College of Management, Sydney) 을 알게 되었고 그 당시 친구가 나대신 인터뷰를 신청해 놓은 것이다. 그때 만해도 인터뷰를 잘만 봐도 학교에 갈수 있었다.

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놈이 시내 그것도 떨어진 맨리에 가서 인터뷰를 보고 얼떨결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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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경영과 나의 눈물

나는 맨리 ICMS 호텔학교를 등록했고, 나의 통장은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사실 학교를 들어간 것도 행운이다. 그 당시 나에게 인터뷰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영어 실력은 별로인데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고"….

사실 다 알아듣진 못했는데 대충 그런 말인 것 같았다.
그때의 나의 영어 실력에 한가지 학교를 떠들썩 한 사건이 있었다….

밥을 먹으려고 학교 식당에 있는데 나누어주는 Term1 학생이 나에게

"Are you Vegetarian?" 하고 말하는 것이다.
난 이렇게 말했다. " I am Korean" 그러자 주변에서 끽끽 대는 것이다…

난 순간 당황했고 무슨 문법이 들렸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 문장을 폼 나게 만들었다
"I was not born in Vegetari……I am Korean" 그러자 왠걸,,,, 이번엔 식당이 난리가 났다 .

그리고 일주일 만에 이 소문은 학교 전체에 펴졌고 아이들은 날 "Korean" 이라 불렸다.
이 사건은 후배들도 지금도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한다,,,,,,
아~ 왕 X 팔린 내 인생의 오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으로 선생님들도 날 모두 알게 되었고 난 비운의 스타가 된 건 사실이다.

학교는 Term2 끝나고 실습을 갈수 있었다. 난 그날만을 기다렸고 더 이상 그날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영어가 서투른 내가 할 수 있는 건 Housekeeping 그것도 Public Area 바로 화장실 청소… 하지만 당당히 일했다.

정말 몸이 아파서 학교는 못 가도 일은 하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난 오후 수업을 빠지고 일을 갔다.
그러다 호텔에서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난 이 일로 교장 선생님에게 불려 갔고 심하게 혼나고 있었다.

그때 또 난 깡이 생겼다 먼가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내가 만일 성적이 아닌학비가 모자라서 학교에서 잘린다면 난 부모님을 원망할 것이다 난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을 원망하기 싫다 난 지금 학비가 모자라다"

그리고 조금 액션으로 글썽 글썽…….

이런 내 말에 교장이 아무 말 없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리곤 그 일이 있은 후 학교에서는 특별히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난 공부와 일을 본격적으로 했다…..
드디어 실습 난 두 개의 호텔에서 일했고 9개월 동안 잠은 하루 5시간이 최고 였다. 72kg 로 호주 와서 58kg 까지 살이 빠 지고 있었다. 그렇게 여기 저기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근데 어느 금요일 밤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을 마치고 Housekeeping 에서 청소를 할 때 Night Manager 가 호출을 했다.….

"Banquet 화장실 청소"

난 3층 화장실로 갔고 남자 화장실에 들어 갔을 때 많은 10대 아이들을 보았다. 그래도 여느 때 처럼 무시하고 내일을 했다 ….. 바닥에 떨어진 화장지 줍고, 화장지 보충해 주고, 쓰레기통 비닐 바꾸어주 고 그리고 세면대 정리해주고 그리고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문을 연 순간 난 기절 초풍 할뻔 했다….

아~ 머이리 Asian 여자 애들이 많은지 순간 문을 닫고 그냥 나왔다. 그리고 전화로 Night Manager 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도와 달라고 했다. 매니저는 화장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10 분만 나가 달라고 요청했고 난 문밖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나오고 있는 학생중에 한국 학생이 있었던 것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두 여학생이 나를 보며 서로 한국말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 한국사람이지 객지에서 고생한다"

난 이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쫓아가서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참 오빠 벌인 나에게~ 으윽~…….그날은 고등학교 졸업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난 여기저기 음악 소리가 퍼지는 그곳을 피해 옥상으로 올라 갔고 그런데 그곳에도 음악소리는 들리는 것이었다.

어린애들 이 즐기는 파티 음악소리에 맞추어 난 호주에서 지금 뭘 하고 있나 생각했고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정말 한 맺힌 목소리로 그 동안의 설움과 멸시를 내 눈물로 다 삭히고 있었다…..

아~ 그때는 정말 가난에도 굴하 지 않았는데 내 자신이 너무 작아 보였다.

그래서 난 9개월 동안 1896 시간을 일했고 실습시간 1200 시간도 못체우는 다른 학생들 보다 엄청 더 한 것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 ICMS 에서 깨지지 않을것이다. 난 사실 호텔 학교 다닌 것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 강하다.
내가 만약 다른 학과를 지원 했다면 난 호주에서 공부 할수 없었을 것이다.
호주는 학생비자는 법적으로 한 주에 20시간 밖에 일을 할수 없다. 난 학비가 필요했고, 호텔이라는 안전한 곳에서 실습생이란 명분아래 얼마든지 일할 수 있었고 두 호텔에서 일해서 남은 두 학기 돈을다 벌었다.

그리고 아주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Diploma 를 졸업했고 난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미국 라스베가스로 씨저스 팔러스 호텔에서 난 일할 수 있다는 허가서를 학교 로부터 받았고 6500개 객실이 있는 호텔에서 난 본격적으로 호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아기가 생기는 바람에 난 학생의 신분이고 결혼식은 아직 올리지 않았지만 미국보단 사랑하는 여자의 내 아기를 택했고, 계획에도 없던 대학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님 호주에서의 비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는 호주에서 낳자는 말에 난 공부를 더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부터 엄청난 고생이 다시 시작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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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기 Lee Ji Woo (이지우)

내가 대학 (Macquarie University) 에 입학할 때 난 사실 겁났다. 막상 아기를 낳기로 했지만 혼자 살기도 벅찬데 이젠 입이 하나 더 는다면 정말 두 배로 일을 하고 공부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마음 먹은 것이니깐 해보자 "애라~ 깡 으로 한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다.

학교수업은 Diploma 와는 비교를 할수 없었다. Essay 는 물론 Presentation 까지 정말 눈코 뜰 세 없었고 난 또 정신 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드디어 7월 22일 일요일 새벽 1시 30분에 아기가 태어났다.

호주는 산모 옆에서 아기 낳는 것을 볼수 있다. 아기가 나오는 것을 모두 사진으로 찍으려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태어나고 10 분 후에 정신 차리고 찍었다.

그리고 탯줄도 아빠가 자를수 있다 이 호주란 나라는 말이다.
사실 탯줄을 보고 그것(?) 으로 착각해서 아들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딸이었다.
그래서 탯줄 자를 때 정말 신경 써서 잘랐다……배꼽이 못생겨서 배꼽티 못 입으면 아빠 원망 할 것 같아서 여러 번 물어보고 짧게 잘랐다…..ㅋㅋㅋㅋ

그래서 그런가 우리 지우 배꼽도 이쁘다,,,,,,
이쁜 우리딸 지우는 아빠에게 힘을 주는 천사였고 지우가 생긴 이후로 모든 일이 너무나 순조롭게 잘 진행 되었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모두들 우리딸을 보자고 난리였고, 난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우리딸을 학교 교수님과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지우의 백일날은 25명의 학생들이 우리집 으로 왔고 우리 부부는 나라별로 3번이나 백일 파티를 했다……

그리고 돌에는 내가 근무하는 파크로얄 호텔에서 파티를 해주었다.

"이쁜 우리딸 지우 너에게 힘든 생활을 물려 주지 않을거다…. 그리고 아빠가 가난으로 잃은 많은 기회를 너에게는 돌아오게 해줄거다." -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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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거주와 마음가짐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것은 돈 때문에 기회를 잃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 하는 학생들이 유학을 결심하고 돈 때문에 포기한다. 난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1년이든 5년이든 일하며, 벌어서 그 목표를 이루라고 말이다.

난 한국에서 대학에 떨어졌다. 그리고 호주 와서 그 공부를 영어로 했고,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공부를 했다.
공부 하는 동안은 거의 그지 생활을 했다. 머리를 3개월 동안 자르지 못했고 그런 나에게 같은반 동생이 "형 머리가 너무 지저분해" 하고 돈을 주기도 했다.

오랫동안 난 한 우물만 팠고 지금 그 결과에 만족 한다. 졸업식때 한국사람은 나 혼자 였고 한 과목도 Fail 하지 않고, 졸업한 한국 학생도 내가 처음 이였다.

Bachelor(학사) 가 끝나는 시험의 마지막날, 대학&대학원 교장 Ms. Conde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동안 수고 했다고" 난 너무 고마웠고 대학원까지 마음 먹었다.

유학을 결심한 학생들에게 감히 말한다. 난 아버지 없이 구로공단 일신통신에 20년 동안 일을 하신 어머니 밑에서 일하며 공부 했다. 그리고 가진돈도 없었다.

그러니 유학을 결심하고 돈 때문에 포기 한다면 훗날 두고두고 후회 할것이다. 그리고 난 호주에선 탈선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이윤, 한국에서 해 보았고 그 결과가 대학 낙방 이라는 실패도 맛보았다.

그러므로 난 한국에서 어떤 일을 했든 어떤 환경이든 상담을 할 때 개의치 않는다..

단지 상담할 때 느낄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열의가 있는지를...
나도 사람이다. 난 열의가 있는 학생에게 관심이 더 간다..
나에게도 하루 한정된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나도 뜻 깊게 쓰고 싶다.

어머님 말씀이 "우리 집돈 10만원은 다른 집 100만원이다"

난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호주로 왔다. 그리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며 공부 했다고 감히 말한다.
어머님의 눈물로 자란 나는 어머님께 당당한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이다. 그리고 지금 하는 일은 유학회사 그리고 앞으론 무역으로 나의 꿈을 펼칠것이고 기본적인 Business 는 호텔학교와 호텔에서 일하며 배웠고, 우리 직원들은 이런 나를 믿고 일하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도 많으신 분들께서 이런 나를 믿어주시고 도와 주시고 있다. 대학교 교수님,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 그리고 많은 학원 강사님들이 우리 카페/홈페이지를 찾아주 신다하니,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난 그분들의 믿음에 보답하고자 일을하고 있고, 바로 그분들이 나의 꿈의 밑바탕이다.

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돈보다 그리고 능력보다 믿음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난 그분들이 보내주신 학생들을 내동생 처럼 대하고 있다……

사실 화 날때는 욕도 한다… 그이윤 내가 그들의 형 또는 오빠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이익은 어디서 얻어요 다 꽁짜로 해주면?" 난 말한다.
이익은 바로 현지 호주 사람에게서만얻는다. 그 외 모든 돈은 받지 않는다…

수속료, 픽업, 상담, 일자리 그리고 숙소 문제도 호주에 오래 거주한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일들로 돈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
날 믿고, 우리를 믿고 온 학생들은 난 저버리지 않는다.
그렇다. 우린 인터넷상에서만 만나지만, 항상 서로에게 신뢰를 갖고, 믿어준다면 안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호주는 기회가 많은 나라이다.

그래서 난 호주를 택했고, 이만큼 성장해서 어머님과 사랑하는 아내와 아기와 함께 살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생활기이다.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이것으로 끝을 내야겠다.

난 아버지 얼굴도 뵙지 못했다, 아니 기억을 할 수가 없다 내 나이 2살 때 돌아가셨으니깐, 나는 영어학교부터 대학원까지 호주에서 다녔고, 호텔 화장실 청소부터 7단계를 거쳐 부지배인이 되었다.
이젠 집앞에서 우리 아이와 낚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고, 가족과 함께 주말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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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Lee - 이보현

Dipoma of Hospitality @ ICMS
Bachelor of Business @ Macquarie University
Master of Information Systems
IBN Director
iBN 유학 실장
ICMS 호텔학교 아시아지역 총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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